재즈는 아는 만큼 연주할 수 있고, 아는 만큼 들리는 음악이다. 감상자 입장에서 곡의 형식을 이해하고 코드 진행을 알아 차릴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연주력을 가늠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재즈 매니아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눈과 귀를 갖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또 하나의 재즈에세이>를 읽고 그가 색소폰 연주자 소니 롤린스에 대해 쓴 구절을 이해하려고 애써 본 적이 있다.

“롤린스의 매력은 얼마든지 들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은 스탠더드 송을 연주할 때의 저 소름끼치는 해상력이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노래의 품으로 파고 들어 일단은 그 내용을 느슨하게 풀었다가 자기 마음껏 재구성하여 다시 나사를 꽉 조인다. 구조만 남기고 텍스트의 내부를 바꾸어놓은 것이다. 나는 그런 때의 그의 기민한 판단력에 늘 황홀감을 느낀다. 이과계통인 존 콜트레인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포기하고 선택적 취향에 만족하며 소극적 매니아로 남기로 하였다. 재즈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앨범 ‘kind of Blue’를 듣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이 앨범을 그렇게 유명하게 만들었는지 의아해하며 심드렁해질 것이다. 록의 역사에서 같은 격이라 평가받는 비틀즈의 앨범 ‘Sg.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를 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확실히 재즈는 다가가기 어려운 음악이다. 빅밴드시절의 유명 뮤지션인 글렌밀러Glenn Miller가 종종 연주를 하기도 했고 특히 어니언링이 맛있기로 소문난 미국 아이오와주의 작은 바를 방문하기 위해 10여 년전 미주리주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긴 드라이브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동행한 노스웨스트미주리 주립대학교 총장내외는 재즈 채널에 라디오를 맞춰놓고 스윙재즈 시대의 알려진 곡들을 흥겹게 따라 부르며 재즈에 얽힌 몇가지 추억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재즈를 탄생시킨 미국조차 이미 오래 전부터 재즈는 일반인들이 즐겨 듣는 음악으로서 자리를 잃어 버렸다. 재즈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찾아 듣는다 하더라도 팝에 익숙한 우리의 귀는 아름다운 혹은 인상적인 멜로디의 재즈에 먼저 눈길을 보내거나 노라 존스같은 팝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보컬부터 찾아 듣기 시작한다. 그러다 의식적이든 아니면 우연한 기회가 되든 재즈의 매력이란 것에 차츰 흥미를 갖게 된다. 가령 비밥재즈 시대의 대표적인 곡으로 알려진 마일즈 데이비스 작곡의 ‘Donna Lee’를 들으면서 찰리 파커의 색소폰과 버드 파웰의 피아노, 마일즈 데이비스의 트럼펫, 토미 포터의 베이스, 맥스 로치의 드럼이 주고 받는 솔로잉의 매력에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하게 되고, 다른 연주자들의 Donna Lee가 궁금해서 유투브를 뒤지면서 점차 재즈 감상의 스펙트럼을 넓혀 가는 식이다. 인터넷이 워낙 발달된 시대에 살다 보니,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를 좋아하는 레게 팬이 웹 서핑을 하다 자메이카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 몬티 알렉산더가 1976년 몽트레 재즈페스티벌에서 그 곡을 연주한 것을 발견하고 재즈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재즈클럽의 라이브 연주를 듣게 되면서 재즈의 매력을 본격적으로 느끼게 된다. 모든 라이브 연주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즉흥연주의 묘미를 맛깔스럽게 드러낸 연주라면 재즈는 더 이상 ‘듣는’ 재즈가 아닌 ‘보고 듣고 느끼는’ 재즈로 바뀌게 된다. 연주자끼리 주고 받는 음악적 대화에 신기해하고, 솔로연주자가 펼치는 독창적인 창작 세계에 초대되어 그들의 음악적 사고를 쫒아가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재즈평론가 그리들리는 이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뮤지션들은 신선한 사운드를 만드는 동안에 우리를 자신들의 세계로 이끈다. 이것은 흡사 누군가 캔버스를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물감을 만드는 것을 보는 것과 동시에 아티스트가 그 캔버스에 바로 그 물감을 칠해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전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과도 비슷한 경우이다. 

탐구하는 자세로 재즈를 들여다보면 재즈의 역사가 뉴올리안즈재즈에서 스윙재즈, 다시 비밥재즈로 발전되는 식의 단순한 흐름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전 시대의 사라져가는 스타일을 다음 시대의 스타일들이 이어 받는, 깔끔하게 정리된 계승의 연속선상으로 볼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통상 재즈에 있어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들은 그때마다 특정한 팬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누린다 할지라도 항상 함께 공존하여 왔다. 사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은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연주 스타일을 추구해 나갈 뿐이며, 종종 그러한 스타일은 현존하는 스타일인 경우도 있고, 자신들의 음악적 취향과 능력에 맞춰 변경시키거나 다른 음악 스타일, 또는 다른 종류의 음악과의 결합을 시도하기도 한다. 허비 핸콕이 “재즈는 다른 형식의 음악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열려있고, 다른 형식의 음악에 영향을 줄 만큼 강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재즈는 열려 있는 음악이다. 이러한 재즈의 특성은 연주자에게도 그대로 들어나 있다. 뛰어난 솔로연주자에 대한 대중의 편향된 취향에도 불구하고 재즈는 앙상블 예술이다. 독창적인 즉흥연주를 위해 연주자는 늘 다른 연주에 경청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동료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과 너무 다르다해도 마찬가지이다. 100여년의 재즈 역사는 최소한 생계를 목적으로 연주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재즈의 생명력은 ‘재즈 정신jazz spirits’에 있다. 무수히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늘 경청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규정된 틀과 정해진 관습, 익숙한 연주 방식을 거부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재즈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갔다. 재즈 정신은 곧 혁신의 정신이다. 

우연한 기회에 재즈를 접하게 되고, 즉흥연주를 이해하게 되어 연주자를 중심으로 재즈의 역사를 살피다보면 자연스럽게 ‘재즈의 정신’에 다다르게 된다. 재즈의 생명력은 재즈 정신에 있고, 이는 곧 혁신의 정신이라 한다면 재즈 정신으로 충만한 조직 ‘재즈컴퍼니’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